멘토 문봉열 원장님이...<<오래 전에 쓴 편지>>
文奉志洪
6
2099
2017.10.06 09:04

시정에 바쁘신 000논산시장님께...
존경하는 000시장님
부족한 글 읽어 주심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부모님이 논산 시 강경읍으로 이사 오시면서 젓갈 사업을
시작하신 관계로 주말 마다 강경포구를 산책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2011년 논산시 인구는 약 128,000명 정도로 알고 있으며,
강경인구는 약 11,300명 정도입니다.
이런 강경이 평양, 대구와 더불어
조선 삼대 시장이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평양과 대구는 지금 인구 200만 명인 것에 비하면
강경이 잊혀져가는 도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쉽게 강경을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거대한 프로젝트로 신도시를 건설하려고 땅을
파헤치다가 고대의 유물이 나오면 그곳을 유적지로 지정하고는
뒤늦게 보호니 관찰이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많은 예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경은 개발도 없고 특별한 관심이 없는 데도
강경상인 이라는 명맥을 유지해 보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다른 부류의 상인 대다수가 떠나버린 텅 빈 옛 시장에서
전통문화 발효식품으로 젓갈만이라도 살려보겠다는 의지로
백 명이 넘는 상인들을 결속시켰습니다.
강경은 청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 온
문화유산의 고을인데 논산시민 반 이상이 이용에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을 내세워
특별한 연구조치도 없이 쉽게 세무서를 옮기더니,
이어 경찰청과 법원도 옮기려 한다는 것은
어쩌면 200년 모진 풍파를 격고 버틴 문화유산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훼손하는 무관심한 처사는 아닌가 하여
알 수 없는 역사 속 이야기를 상상하며 나름대로 강경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강경도서관 조차 강경에 대한
어떤 문헌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과거나 현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경제 문제인데, 다른 고장과 비교하기 힘든 재력을 가지고
3대 시장으로 꼽히던 강경을 쉽게 잊어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특별한 침략이나 전투도 없는 지역에서 그 많은 재력가들이
순간 약속이나 하듯 강경을 외면하고 떠난 배경이 궁금하여
강경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습니다.
강경은 잊혀져가는 도시가 되면 안 됩니다.
땅속에 묻히거나 무분별한 개발로 사라지는 문화거리가 아닌
과거의 역사가 현존하는 교육거리로 영국이나 프랑스에
뒤지지 않는 근대거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하면서도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하곤 합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강경이야기가 검증되지 않은
우리의 과거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결코 부끄러운 상상속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먼저 밝히고 강경이 경제도시였었다. 라는
말을 하려고 합니다.
경제도시 강경이 역사에 기록으로 남겨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강경이 경제도시였었다. 라고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승자가 쓴 기록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듯,
이제 저는 강경이 경제도시였었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강경은 묵묵히 시대적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평화 시에는 충효를 숭상하며 농업을 중시하였고,
서민들이 모여 어류를 부패에서 방지하고
서서히 발효되는 염장법을 발달시켜
절인 어류가 전란에는 비상식량으로서의 몫을 톡톡히 하였고
근대사회에서는 최초의 지방은행, 경찰서, 법원 및 세무서를
유치하면서 사회적인 흐름 전반에 항상 앞서나갔습니다.
그런 강경이 지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조선 역사에 빛을 발한 강경이
지금 어느 도에 속하고 있는 지도 대다수 사람들은 모릅니다.
다시 표현하면 다른 고장에 비해 모든 것을 먼저 시작하고도
1등의 자리를 내어주는 슬픈 역사의 경제도시라는 것입니다.
한때 유행하던 웰빙 음식문화가 슬로우 푸드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뒤흔들면서 우리나라의 발효식품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발효식품 시장이 어쩌면 1조를 넘어
무한대로 성장할 것이라는 경제성장 예측이 나오자,
신안, 무안, 광천, 소래, 강릉, 보령, 강화,
그리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전설처럼 강경을 이끌었던 상인들이 거지반 떠나버린 지금
새롭게 강경 전통문화 발효식품으로 도약하려는
강경을 위협하는 겁니다.
강경은 논산시와 주민, 그리고 상인들이 하나가 되어
옛 경제도시의 영화를 찾아야 합니다.
1, 강경은 새우젓과 오징어 생산지도 아니고,
2, 강경은 상표등록이나 신선한 대표 이미지 로고도 없고,
3, 강경은 보령이나 광천처럼 미시여구로 소비자를 유혹할 수
있는 토굴도 없으며,
4, 강경은 계절마다 시원한 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단풍과 같은
절경의 볼거리로 연계된 여행의 통과지점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친 지리적 악조건의 고을입니다.
5, 강경은 간혹 신세대가 꿈속에 그려보는 조상님이 계승시킨
장인의 숨결이 담긴 역사적인 비법과 전수를 우리 강경만이
가지고 있다고, 내 보일 것이
없는 소박한 염장법만 살아있는 아주 작은 고을입니다.
하지만, 강경은 쇠퇴한 고을이 아니라,
좁은 면적에 비해 문화유적지가 가장 많고,
근대적 건물이 수세기 동안 그대로 연계 유지된 채로
개발이 가장 안 된 청정 고도의 살아있는 교육도시라는 것을
고조시키면서 향토 젓갈 축제와 접목시켜야 된다고 봅니다.
강경은 누구나 쉽게 찾아왔다가 쉽게 떠나는 고을이었지만,
강경을 찾았던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말하기를
강경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꼭 찾아보고 싶은
고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강경은 지식과 충절의 고향이라 배고픔과 절망으로
갈 곳 없어 찾아왔다가도 많은 재물을 모으고 뜻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해서는 자신이 떠나왔던 삶의 터전인 고향으로 빠르게
되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입니다.
강경 시장을 돌아보면 상인들이 지혜를 모아
물건과 객이 드나들기 쉽게 미닫이문으로 개조한 장방형의
목조건물이 마주보며 일자로 원하는 물품을 편하게 찾도록
즐비하게 이어지는 거리로
설계 되어 만들어 졌습니다.
선전<일광단, 월광단, 호사스런 비단>, 저포전, 미전, 잡곡전,
좌반전<짱아찌>, 연초전, 생선전, 유기전, 의전, 경염전<구운소금>,
상전<꿀 찌꺼기 가죽말총> 철물전, 과전, 채소전, 분전, 면포전,
지전, 승혜전<짚신, 삼은미투리>, 현방<고기>,
화피전<중국 과실, 벚나무 껍질> 시저전, 등의 상단을 거느리고
책쾌, 서쾌을 취급하는 거간꾼이 있는
거대한 경제도시로 강경을 꾸몄습니다.
또한 강경은 면적이 좁은 관계로 집주위에 두른
담장은 모두 없애고,
이층 누각의 기둥은 배어버리고
호화롭게 채색한 단청도 벗겨버리고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려고 짓는
대저택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강경은 육지가 풍년 일 때 곡물을 사서 저장할 수 있는
통풍이 수려한 곡간을 많이 지어야 하는 미래를 설계했고,
육지가 흉년이면 해상에서는 더 많은 산물이 나니
어류를 보관하는 염장법을 새롭게 보전했습니다.
대행수를 뽑아 소금 생산을 직접 관리하여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곳에 배를 띄워
가장 무거운 곳의 해수를 떠서 삼일이 지난 다음에
이를 끓여 소금을 채취하게 했습니다.
끓여낸 소금을 맷돌과 절구로 아주 작게 갈아 고급화하여
식염 시장을 확대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주점, 관사, 소금창고에 도둑이 들지 못하도록 강경상인들만의
엄한 법률과 기율을 재정하여 상인과 주민에게
차별 없이 공정하게 실현하였습니다.
타지방 물건의 가격을 알아보고 매일 얼마의 양이 팔리는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사는지
급한 사람의 사정을 듣는 것은
불난 집의 불을 힘을 합해 꺼주는 것과 같다며,
상인들 모두가 연계하여 한마음으로 고객의 수요가 있으면
누구든지 소유한 물건을 아낌없이 내놓아 재빨리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원활한 체제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지식을 개인의 것이 아닌
모두가 하나 되는 화목과 화평의 계기로 활용하여
이웃과 더불어 풍족하고 풍요롭게 사는 지혜를 펼쳐나가는
강경 상인들은 16세기에 식용이 아닌 약용으로 쓰였던 배추가
19세기 초에 개량되어 조선에 들어온 배추를 절묘하게
고춧가루와 새우젓으로 알맞게 버무려 조화를 이룬
시원하고 매운 김치의 맛으로
그동안 길들여진 백김치와 동치미의 맛을 능가하는 새로운 맛이
강경을 찾은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1876년 개항이 되어 수입품이
들어올 때 여송연 1갑은 소 한 마리 값이고 황소는 40원이고
무명 1필이 12냥, 비단 1필이 쌀 35가마,
양초 4통이 쌀 1가마, 쌀 1가마는 12원 정도였습니다.
양반이라면 누구나 코에 걸쳤던 수입안경은 15원에 매매 되었고,
무엇보다 한심했던 것은 일본이 러일전쟁 때 진해 땅을 군항으로
쓰려고 흥정을 할 때 정부는 일본 외무성에 땅 한 평을 5전에
흥정을 했고, 주민은 9전을 요구했다합니다.
나라 곳곳에서 흥청망청 자신의 이속만 챙기면서
나라의 흥망에는 관심이 없던 암울하기만 하던 시절에도
강경 상인들은 이익을 앞세운
매점매석과 같은 폭리에 현혹되지 않는 단합으로
상인 모두는 일본 수입품을 취급하지 않았고,
왜인들에게는 쌀도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금 본위제를 쓰는 일본 돈이 들어와 일본지전을
은행에 가져가면
금으로 바꾸어 준다하는 소문이 각처에 떠돌자
조선 돈을 가지려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일 때에
강경상인들은 대행수를 중심으로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기고도
두 대륙을
점령하지 않고 전쟁 보상금만 받은 사실을 분석하고는
싸우지 않고 경제적 우위를 내세워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정치적 야욕을 직시하였습니다.
강경 상인들은 조선 경제가 일본에 존속되어지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조선에 잠식되어 가는 일본 돈을 마다하고
조선 돈 만을 고집하는 애국심을 보이면서,
강경은 묵묵히 시대적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강경은 고려가 망한 후에 모인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개인의 부와 명성을 다 버리고
한 울타리에서 화합과 화목으로
탄생시킨 거대한 경제 집단 이었습니다.
1902년 조선의 총 세입은 7백 50만원 이었고,
강화도에 배치한 대포 한 문은 7만원 정도였는데
당시 조선은 대포 살 돈도 없었다고 하며,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강경상인들은 수 십 만원의 돈을
거출하여 요긴하게 사용했다 합니다.
그런 시대에 그 많은 개혁을 이루면서
경제도시의 업적을 남긴 강경상인들이
도대체? 왜?
흔적도 없이 강경을 떠났을까?
하는 아쉬움과 끝없는 상상을 하면서
전 과거의 상상으로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전 옥녀봉에 올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말없이 흐르는 금강을 보면서
옛 강경포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전공분야가 달라, 글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살아 숨 쉬는 강경을
소설로 재조명 해주실 작가님을 찾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은 했지만,
시장님이 나서주신다면,
강경의 옛 자긍심을 찾을 수 있지 않을 까 합니다.
부족한 글로 강경 상인들이 강경을 떠나야 했던
마지막 모습을 그려 봅니다.
***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한참을 감았던 눈을 뜨고
대행수가 옥녀봉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은
조부의 조부가 들려주었다던
황룡이 용트림하며 힘겹게 강경을 감싸 안는 모습
애타는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송악에 사셨던 4대 조부가
이주를 결심하고 김삿갓을 만났을 때,
평양은 형주의 지형이라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 바닥에 구멍을 내 침몰시키는 형이니,
평양 사람들은 대동강 물을 퍼서 생활에 사용하여야
기가 쇠하지 않는 지형으로
평양 사람의 행실이 문제이고...
강경은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이
마치 입에 물었던 여의주를 잃은 황룡이
급히 강경을 다듬어
여의주를 대신하여 승천하고자
몸부림치는 지형으로
강경은 시절과 하늘의 감복이 따라야
마을이 쇠하지 않는 다는 말을 듣고
조부의 조부는 사람의 행실을 믿을 수 없다며
시절을 따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평양 대신 강경을 택해 이주했다 했네.
이제, 그대들은 가라, 가거라...
만주 던, 북간도던, 상해나, 법국이나, 아라사로 가라.
우리의 고려도 갔고, 너와 나의 조선도 저물어가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나라를 다시 새워야하니...
강경을 떠나...
그대들의 경륜과
그대들의 재물을 옳게 써야 하느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먼 훗날 조선 역사에 경제도시 강경이 있었다는 것/
잊지 말고...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
글에 자신이 없어
부족한 가상 표현에 한계를 느끼면서도
옛 강경포구를 상상하면
제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가에 눈물이 고입니다.
잃어버린 과거를
발굴과 발췌로 힘들게 알아가는 것에 앞서
현재를 지키고 보전하는 것이
쉽고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서없이 나열한 제 상상의 이야기인
역사 속 경제도시 강경을 읽어 주신 시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면서.
잊혀 진 경제도시 강경을 재조명 해주실 작가님을
찾았으면 합니다.
20**년, 2월, 7일 강경주민 문봉열 배상.
존경하는 000시장님
부족한 글 읽어 주심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부모님이 논산 시 강경읍으로 이사 오시면서 젓갈 사업을
시작하신 관계로 주말 마다 강경포구를 산책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2011년 논산시 인구는 약 128,000명 정도로 알고 있으며,
강경인구는 약 11,300명 정도입니다.
이런 강경이 평양, 대구와 더불어
조선 삼대 시장이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평양과 대구는 지금 인구 200만 명인 것에 비하면
강경이 잊혀져가는 도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쉽게 강경을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거대한 프로젝트로 신도시를 건설하려고 땅을
파헤치다가 고대의 유물이 나오면 그곳을 유적지로 지정하고는
뒤늦게 보호니 관찰이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많은 예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경은 개발도 없고 특별한 관심이 없는 데도
강경상인 이라는 명맥을 유지해 보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다른 부류의 상인 대다수가 떠나버린 텅 빈 옛 시장에서
전통문화 발효식품으로 젓갈만이라도 살려보겠다는 의지로
백 명이 넘는 상인들을 결속시켰습니다.
강경은 청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 온
문화유산의 고을인데 논산시민 반 이상이 이용에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을 내세워
특별한 연구조치도 없이 쉽게 세무서를 옮기더니,
이어 경찰청과 법원도 옮기려 한다는 것은
어쩌면 200년 모진 풍파를 격고 버틴 문화유산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훼손하는 무관심한 처사는 아닌가 하여
알 수 없는 역사 속 이야기를 상상하며 나름대로 강경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강경도서관 조차 강경에 대한
어떤 문헌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과거나 현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경제 문제인데, 다른 고장과 비교하기 힘든 재력을 가지고
3대 시장으로 꼽히던 강경을 쉽게 잊어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특별한 침략이나 전투도 없는 지역에서 그 많은 재력가들이
순간 약속이나 하듯 강경을 외면하고 떠난 배경이 궁금하여
강경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습니다.
강경은 잊혀져가는 도시가 되면 안 됩니다.
땅속에 묻히거나 무분별한 개발로 사라지는 문화거리가 아닌
과거의 역사가 현존하는 교육거리로 영국이나 프랑스에
뒤지지 않는 근대거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하면서도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하곤 합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강경이야기가 검증되지 않은
우리의 과거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결코 부끄러운 상상속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먼저 밝히고 강경이 경제도시였었다. 라는
말을 하려고 합니다.
경제도시 강경이 역사에 기록으로 남겨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강경이 경제도시였었다. 라고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승자가 쓴 기록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듯,
이제 저는 강경이 경제도시였었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강경은 묵묵히 시대적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평화 시에는 충효를 숭상하며 농업을 중시하였고,
서민들이 모여 어류를 부패에서 방지하고
서서히 발효되는 염장법을 발달시켜
절인 어류가 전란에는 비상식량으로서의 몫을 톡톡히 하였고
근대사회에서는 최초의 지방은행, 경찰서, 법원 및 세무서를
유치하면서 사회적인 흐름 전반에 항상 앞서나갔습니다.
그런 강경이 지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조선 역사에 빛을 발한 강경이
지금 어느 도에 속하고 있는 지도 대다수 사람들은 모릅니다.
다시 표현하면 다른 고장에 비해 모든 것을 먼저 시작하고도
1등의 자리를 내어주는 슬픈 역사의 경제도시라는 것입니다.
한때 유행하던 웰빙 음식문화가 슬로우 푸드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뒤흔들면서 우리나라의 발효식품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발효식품 시장이 어쩌면 1조를 넘어
무한대로 성장할 것이라는 경제성장 예측이 나오자,
신안, 무안, 광천, 소래, 강릉, 보령, 강화,
그리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전설처럼 강경을 이끌었던 상인들이 거지반 떠나버린 지금
새롭게 강경 전통문화 발효식품으로 도약하려는
강경을 위협하는 겁니다.
강경은 논산시와 주민, 그리고 상인들이 하나가 되어
옛 경제도시의 영화를 찾아야 합니다.
1, 강경은 새우젓과 오징어 생산지도 아니고,
2, 강경은 상표등록이나 신선한 대표 이미지 로고도 없고,
3, 강경은 보령이나 광천처럼 미시여구로 소비자를 유혹할 수
있는 토굴도 없으며,
4, 강경은 계절마다 시원한 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단풍과 같은
절경의 볼거리로 연계된 여행의 통과지점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친 지리적 악조건의 고을입니다.
5, 강경은 간혹 신세대가 꿈속에 그려보는 조상님이 계승시킨
장인의 숨결이 담긴 역사적인 비법과 전수를 우리 강경만이
가지고 있다고, 내 보일 것이
없는 소박한 염장법만 살아있는 아주 작은 고을입니다.
하지만, 강경은 쇠퇴한 고을이 아니라,
좁은 면적에 비해 문화유적지가 가장 많고,
근대적 건물이 수세기 동안 그대로 연계 유지된 채로
개발이 가장 안 된 청정 고도의 살아있는 교육도시라는 것을
고조시키면서 향토 젓갈 축제와 접목시켜야 된다고 봅니다.
강경은 누구나 쉽게 찾아왔다가 쉽게 떠나는 고을이었지만,
강경을 찾았던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말하기를
강경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꼭 찾아보고 싶은
고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강경은 지식과 충절의 고향이라 배고픔과 절망으로
갈 곳 없어 찾아왔다가도 많은 재물을 모으고 뜻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해서는 자신이 떠나왔던 삶의 터전인 고향으로 빠르게
되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입니다.
강경 시장을 돌아보면 상인들이 지혜를 모아
물건과 객이 드나들기 쉽게 미닫이문으로 개조한 장방형의
목조건물이 마주보며 일자로 원하는 물품을 편하게 찾도록
즐비하게 이어지는 거리로
설계 되어 만들어 졌습니다.
선전<일광단, 월광단, 호사스런 비단>, 저포전, 미전, 잡곡전,
좌반전<짱아찌>, 연초전, 생선전, 유기전, 의전, 경염전<구운소금>,
상전<꿀 찌꺼기 가죽말총> 철물전, 과전, 채소전, 분전, 면포전,
지전, 승혜전<짚신, 삼은미투리>, 현방<고기>,
화피전<중국 과실, 벚나무 껍질> 시저전, 등의 상단을 거느리고
책쾌, 서쾌을 취급하는 거간꾼이 있는
거대한 경제도시로 강경을 꾸몄습니다.
또한 강경은 면적이 좁은 관계로 집주위에 두른
담장은 모두 없애고,
이층 누각의 기둥은 배어버리고
호화롭게 채색한 단청도 벗겨버리고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려고 짓는
대저택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강경은 육지가 풍년 일 때 곡물을 사서 저장할 수 있는
통풍이 수려한 곡간을 많이 지어야 하는 미래를 설계했고,
육지가 흉년이면 해상에서는 더 많은 산물이 나니
어류를 보관하는 염장법을 새롭게 보전했습니다.
대행수를 뽑아 소금 생산을 직접 관리하여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곳에 배를 띄워
가장 무거운 곳의 해수를 떠서 삼일이 지난 다음에
이를 끓여 소금을 채취하게 했습니다.
끓여낸 소금을 맷돌과 절구로 아주 작게 갈아 고급화하여
식염 시장을 확대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주점, 관사, 소금창고에 도둑이 들지 못하도록 강경상인들만의
엄한 법률과 기율을 재정하여 상인과 주민에게
차별 없이 공정하게 실현하였습니다.
타지방 물건의 가격을 알아보고 매일 얼마의 양이 팔리는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사는지
급한 사람의 사정을 듣는 것은
불난 집의 불을 힘을 합해 꺼주는 것과 같다며,
상인들 모두가 연계하여 한마음으로 고객의 수요가 있으면
누구든지 소유한 물건을 아낌없이 내놓아 재빨리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원활한 체제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지식을 개인의 것이 아닌
모두가 하나 되는 화목과 화평의 계기로 활용하여
이웃과 더불어 풍족하고 풍요롭게 사는 지혜를 펼쳐나가는
강경 상인들은 16세기에 식용이 아닌 약용으로 쓰였던 배추가
19세기 초에 개량되어 조선에 들어온 배추를 절묘하게
고춧가루와 새우젓으로 알맞게 버무려 조화를 이룬
시원하고 매운 김치의 맛으로
그동안 길들여진 백김치와 동치미의 맛을 능가하는 새로운 맛이
강경을 찾은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1876년 개항이 되어 수입품이
들어올 때 여송연 1갑은 소 한 마리 값이고 황소는 40원이고
무명 1필이 12냥, 비단 1필이 쌀 35가마,
양초 4통이 쌀 1가마, 쌀 1가마는 12원 정도였습니다.
양반이라면 누구나 코에 걸쳤던 수입안경은 15원에 매매 되었고,
무엇보다 한심했던 것은 일본이 러일전쟁 때 진해 땅을 군항으로
쓰려고 흥정을 할 때 정부는 일본 외무성에 땅 한 평을 5전에
흥정을 했고, 주민은 9전을 요구했다합니다.
나라 곳곳에서 흥청망청 자신의 이속만 챙기면서
나라의 흥망에는 관심이 없던 암울하기만 하던 시절에도
강경 상인들은 이익을 앞세운
매점매석과 같은 폭리에 현혹되지 않는 단합으로
상인 모두는 일본 수입품을 취급하지 않았고,
왜인들에게는 쌀도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금 본위제를 쓰는 일본 돈이 들어와 일본지전을
은행에 가져가면
금으로 바꾸어 준다하는 소문이 각처에 떠돌자
조선 돈을 가지려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일 때에
강경상인들은 대행수를 중심으로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기고도
두 대륙을
점령하지 않고 전쟁 보상금만 받은 사실을 분석하고는
싸우지 않고 경제적 우위를 내세워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정치적 야욕을 직시하였습니다.
강경 상인들은 조선 경제가 일본에 존속되어지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조선에 잠식되어 가는 일본 돈을 마다하고
조선 돈 만을 고집하는 애국심을 보이면서,
강경은 묵묵히 시대적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강경은 고려가 망한 후에 모인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개인의 부와 명성을 다 버리고
한 울타리에서 화합과 화목으로
탄생시킨 거대한 경제 집단 이었습니다.
1902년 조선의 총 세입은 7백 50만원 이었고,
강화도에 배치한 대포 한 문은 7만원 정도였는데
당시 조선은 대포 살 돈도 없었다고 하며,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강경상인들은 수 십 만원의 돈을
거출하여 요긴하게 사용했다 합니다.
그런 시대에 그 많은 개혁을 이루면서
경제도시의 업적을 남긴 강경상인들이
도대체? 왜?
흔적도 없이 강경을 떠났을까?
하는 아쉬움과 끝없는 상상을 하면서
전 과거의 상상으로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전 옥녀봉에 올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말없이 흐르는 금강을 보면서
옛 강경포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전공분야가 달라, 글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살아 숨 쉬는 강경을
소설로 재조명 해주실 작가님을 찾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은 했지만,
시장님이 나서주신다면,
강경의 옛 자긍심을 찾을 수 있지 않을 까 합니다.
부족한 글로 강경 상인들이 강경을 떠나야 했던
마지막 모습을 그려 봅니다.
***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한참을 감았던 눈을 뜨고
대행수가 옥녀봉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은
조부의 조부가 들려주었다던
황룡이 용트림하며 힘겹게 강경을 감싸 안는 모습
애타는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송악에 사셨던 4대 조부가
이주를 결심하고 김삿갓을 만났을 때,
평양은 형주의 지형이라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 바닥에 구멍을 내 침몰시키는 형이니,
평양 사람들은 대동강 물을 퍼서 생활에 사용하여야
기가 쇠하지 않는 지형으로
평양 사람의 행실이 문제이고...
강경은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이
마치 입에 물었던 여의주를 잃은 황룡이
급히 강경을 다듬어
여의주를 대신하여 승천하고자
몸부림치는 지형으로
강경은 시절과 하늘의 감복이 따라야
마을이 쇠하지 않는 다는 말을 듣고
조부의 조부는 사람의 행실을 믿을 수 없다며
시절을 따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평양 대신 강경을 택해 이주했다 했네.
이제, 그대들은 가라, 가거라...
만주 던, 북간도던, 상해나, 법국이나, 아라사로 가라.
우리의 고려도 갔고, 너와 나의 조선도 저물어가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나라를 다시 새워야하니...
강경을 떠나...
그대들의 경륜과
그대들의 재물을 옳게 써야 하느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먼 훗날 조선 역사에 경제도시 강경이 있었다는 것/
잊지 말고...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
글에 자신이 없어
부족한 가상 표현에 한계를 느끼면서도
옛 강경포구를 상상하면
제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가에 눈물이 고입니다.
잃어버린 과거를
발굴과 발췌로 힘들게 알아가는 것에 앞서
현재를 지키고 보전하는 것이
쉽고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서없이 나열한 제 상상의 이야기인
역사 속 경제도시 강경을 읽어 주신 시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면서.
잊혀 진 경제도시 강경을 재조명 해주실 작가님을
찾았으면 합니다.
20**년, 2월, 7일 강경주민 문봉열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