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강경
文奉志洪
6
978
2021.10.11 10:48
직업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명과 조국애로 헌신하는
의료인들에게 작은 힘이 되기를 바란다며 뭉크미술 원장님이 보내주셨습니다.
네이버검색 : 서울바른플란트 청소년의방
제목 : 황혼. <**연재소설**>
지은이 : 文奉志洪
제 32 화 ; 아, 강경
달수는 200평이 넘는 집을 소유한 철중이 자신 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안쓰러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주를 마시면서 이영주의 주소지를 중심으로 지도를 살펴보다가
조선시대 3대 시장인 강경을 처음 가 본다는 것에 마음이 끌려
강경에 대한 문헌을 검색해 보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역사적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에
놀라워하면서 살피던 중에 경제도시 강경이라는 글을
논산 홈페이지 장터마당에서 발췌해 읽었다.
강경은 쇠퇴한 고을이 아니라,
좁은 면적에 비해 문화유적지가 가장 많고,
근대적 건물이 수세기 동안 그대로 연계 유지된 채로 개발이
가장 안 된 고도의 청정 고을입니다.
근대건물이 살아있는 교육도시라는 것을
고조시키면서 향토 젓갈 축제와 접목시켜야 된다고 하며 시작된다.
강경 보다 30배나 인구가 많았던 대구와 평양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고을이 대구를 넘어 평양에 버금가는 명성을 누렸던
그 수수께끼 같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
강경이 경제도시로 탄생된 과정을 가상으로 되짚어 보고자 쓴 글이다.
강경은 누구나 쉽게 찾아왔다가 쉽게 떠나는 고을이었지만,
강경을 찾았던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말하기를 강경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꼭 찾아보고 싶은 고을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강경은 지식과 충절의 고향이라 배고픔과 절망으로
갈 곳 없어 찾아왔다가도 많은 재물을 모으고 뜻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해서는 자신이 떠나왔던 삶의 터전인 고향으로 빠르게
되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었다.
강경은 면적이 좁은 관계로 집주위에 두른 담장은 모두 없애고,
이층 누각의 기둥은 배어버리고 호화롭게 채색한 단청도 벗겨버리고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려고 짓는 대저택을 용납하지 않았다.
강경은 육지가 풍년 일 때 곡물을 사서 저장할 수 있는
통풍이 수려한 곡간을 많이 지어야 한다고 미래를 설계했다.
1876년 개항이 되어 수입품이
들어올 때 여송연 1갑은 소 한 마리 값이고 황소는 40원이고
무명 1필이 12냥, 비단 1필이 쌀 35가마,
양초 4통이 쌀 1가마, 쌀 1가마는 12원 정도였다.
양반이라면 누구나 코에 걸쳤던 수입안경은 15원에 매매 되었고,
무엇보다 한심했던 것은 일본이 러일전쟁 때 진해 땅을 군항으로
쓰려고 흥정을 할 때 정부는 일본 외무성에 땅 한 평을 5전에
흥정을 했고, 주민은 9전을 요구했다.
나라 곳곳에서 흥청망청 자신의 이속만 챙기면서 나라의 흥망에는
관심이 없던 암울하기만 하던 시절에도 강경 상인들은
이익을 앞세운 매점매석과 같은 폭리에 현혹되지 않는 단합으로
상인 모두는 일본 수입품을 취급하지 않았고,
왜인들에게는 쌀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금 본위제를 쓰는 일본 돈이 들어와 일본지전을 은행에 가져가면
금으로 바꾸어 준다하는 소문이 각처에 떠돌자
조선 돈을 가지려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강경 상인들은 굴하지 않고 조선 돈을 고집했다.
발췌한 글을 읽을수록 나라를 사랑하는 상인들의
결속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서민들에게 시간이 나는 데로 작은 수레를 많이 만들게 했고,
돈의 여유가 생기면 소달구지를 확보하고 전쟁을 위해 사육하는 말
대신 소를 정성껏 길러 가세를 키우게 했다.
건강한 신체에 부지런하여 상업에 뜻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돈을 빌어주어 장인들의 수공예품과 그림들을 사 모으게 했다.
이를 실천하여 각자 이문이 생기면 우선 자신들이 살던 초가집을
허물고 물건과 객이 드나들기 쉽게 미닫이문으로 개조한
장방형의 목조건물이 마주보며 일자로 원하는 물품을
편하게 찾도록 즐비하게 이어지는 거리를 만들었다.
선전<일광단, 월광단, 호사스런 비단>, 저포전, 미전, 잡곡전,
좌반전<짱아찌>, 연초전, 생선전, 유기전, 의전, 경염전<구운소금>,
상전<꿀 찌꺼기 가죽말총> 철물전, 과전, 채소전, 분전, 면포전, 지전,
승혜전<짚신, 삼은미투리>, 현방<고기>,
화피전<중국 과실, 벚나무 껍질>
시저전, 등의 상단을 거느리고 책쾌, 서쾌을 취급하는 거간꾼이 있는
거대한 경제도시로 강경을 꾸몄다.
그토록 많은 상인이 한 순간에 사라졌는데도
특별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작가 한명이 태어난 시골 마을도 치장하여
유명관광지로 만드는 외국에 비해
수백 년의 역사가 숨 쉬는 청정고도의 근대도시 강경을
방치한 시 당국행정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달수는 마지막 대행수의 글을 보자
흘러간 역사에 대해 너무 관심 없이 살고 있다는 것에
후손으로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시던 술잔을 물리고 소리 내어 대행수의 글을 읽었다.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한참을 감았던 눈을 뜨고
대행수가 옥녀봉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은
조부의 조부가 들려주었다던
황룡이 용트림하며 힘겹게 강경을 감싸 안는 모습
애타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송악에 사셨던 4대 조부가
이주를 결심하고 김삿갓을 만났을 때,
평양은 행주형이라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 바닥에 구멍을 내 침몰시키는 형이니,
평양 사람들은 대동강 물을 퍼서 생활에 사용하여야
기가 쇠하지 않는 지형으로 평양 사람의 행실이 문제이고...
강경은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이
마치 입에 물었던 여의주를 잃은 황룡이
급히 강경을 다듬어 여의주를 대신하여 승천하고자
몸부림치는 지형으로
시절과 하늘의 감복이 따라야
마을이 쇠하지 않는 다는 말을 듣고
조부의 조부는 사람의 행실을 믿을 수 없다며
시절을 따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송악에서 평양 대신 강경을 택해 이주했다 했네.
이제, 그대들은 가라, 가거라...
만주 던, 북간도던, 상해나, 법국이나, 아라사로 가라.
우리의 고려도 갔고, 너와 나의 조선도 저물어가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나라를 다시 세워야하니...
강경을 떠나...
그대들의 경륜과
그대들의 재물을 옳게 써야 하느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먼 훗날 조선 역사에 경제도시 강경이 있었다는 것/
잊지 말고...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달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 일찍 세종시를 지나
논산 초입에 들어서면서 수 십 번 읽은 대행수의
글을 되짚어 보았다.
일본에게 군사적 힘에 이어 경제적인 수단마저
빼앗길 수 없다며 상인들을 회유해 강경을 떠나게 한
대행수의 결단을 알 것 같았다.
황금 들판을 이룬 벼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화려하고 자랑스러웠던 강경의 슬픈 역사를 진정 아느냐고
물어 보는 것 같다.
왕복 2차선으로 접어들면서 강경경찰서를 지나 역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법원 앞에 도착했다.
청주에서는 대로변 교차로는 물론 골목 4거리에서도 흔히
보던 부동산 이라는 간판을 찾아 볼 수 가 없다.
차를 인도에 바짝 붙이고 2층 법무사 사무실에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채산리 산 10-1을 물었다.
나이 많은 분이 상세히 알려 주면서
이곳은 부동산 사무실이 없으니 주민들에게
용암사를 물어 보면 쉽게 알려 준다는 말을 덧붙였다.
조선 최초의 은행, 조선 최초의 법원과 경찰서를 뒤로 하고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이 도라고 말씀하신,
고운 최치원 선생의 말씀을 상기하며 마을 골목길로 들어섰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조금 걷자
올려보니 백운이요 건너보니 청산이라.
찌든 도시를 떠나 이곳에 오니 시조가 절로 읊어졌다.
대웅전의 동쪽에는 민간신앙인 7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 산사자락의 분홍빛 진달래가
말을 거는 듯, 산들바람에 좌우로 흔들린다.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따라
푸른 솔잎의 거목이 울창하고,
높새바람 부는 창공에 구름은 간곳없다.
푸른 하늘이 맑은 물처럼 천지를 감싸 안은 채,
지저귀는 산새 소리는,
세상 근심 다 떠나보내고 ,
달수를 즐겁게 따라붙는다.
의료인들에게 작은 힘이 되기를 바란다며 뭉크미술 원장님이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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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황혼. <**연재소설**>
지은이 : 文奉志洪
제 32 화 ; 아, 강경
달수는 200평이 넘는 집을 소유한 철중이 자신 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안쓰러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주를 마시면서 이영주의 주소지를 중심으로 지도를 살펴보다가
조선시대 3대 시장인 강경을 처음 가 본다는 것에 마음이 끌려
강경에 대한 문헌을 검색해 보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역사적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에
놀라워하면서 살피던 중에 경제도시 강경이라는 글을
논산 홈페이지 장터마당에서 발췌해 읽었다.
강경은 쇠퇴한 고을이 아니라,
좁은 면적에 비해 문화유적지가 가장 많고,
근대적 건물이 수세기 동안 그대로 연계 유지된 채로 개발이
가장 안 된 고도의 청정 고을입니다.
근대건물이 살아있는 교육도시라는 것을
고조시키면서 향토 젓갈 축제와 접목시켜야 된다고 하며 시작된다.
강경 보다 30배나 인구가 많았던 대구와 평양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고을이 대구를 넘어 평양에 버금가는 명성을 누렸던
그 수수께끼 같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
강경이 경제도시로 탄생된 과정을 가상으로 되짚어 보고자 쓴 글이다.
강경은 누구나 쉽게 찾아왔다가 쉽게 떠나는 고을이었지만,
강경을 찾았던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말하기를 강경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꼭 찾아보고 싶은 고을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강경은 지식과 충절의 고향이라 배고픔과 절망으로
갈 곳 없어 찾아왔다가도 많은 재물을 모으고 뜻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해서는 자신이 떠나왔던 삶의 터전인 고향으로 빠르게
되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었다.
강경은 면적이 좁은 관계로 집주위에 두른 담장은 모두 없애고,
이층 누각의 기둥은 배어버리고 호화롭게 채색한 단청도 벗겨버리고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려고 짓는 대저택을 용납하지 않았다.
강경은 육지가 풍년 일 때 곡물을 사서 저장할 수 있는
통풍이 수려한 곡간을 많이 지어야 한다고 미래를 설계했다.
1876년 개항이 되어 수입품이
들어올 때 여송연 1갑은 소 한 마리 값이고 황소는 40원이고
무명 1필이 12냥, 비단 1필이 쌀 35가마,
양초 4통이 쌀 1가마, 쌀 1가마는 12원 정도였다.
양반이라면 누구나 코에 걸쳤던 수입안경은 15원에 매매 되었고,
무엇보다 한심했던 것은 일본이 러일전쟁 때 진해 땅을 군항으로
쓰려고 흥정을 할 때 정부는 일본 외무성에 땅 한 평을 5전에
흥정을 했고, 주민은 9전을 요구했다.
나라 곳곳에서 흥청망청 자신의 이속만 챙기면서 나라의 흥망에는
관심이 없던 암울하기만 하던 시절에도 강경 상인들은
이익을 앞세운 매점매석과 같은 폭리에 현혹되지 않는 단합으로
상인 모두는 일본 수입품을 취급하지 않았고,
왜인들에게는 쌀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금 본위제를 쓰는 일본 돈이 들어와 일본지전을 은행에 가져가면
금으로 바꾸어 준다하는 소문이 각처에 떠돌자
조선 돈을 가지려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강경 상인들은 굴하지 않고 조선 돈을 고집했다.
발췌한 글을 읽을수록 나라를 사랑하는 상인들의
결속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서민들에게 시간이 나는 데로 작은 수레를 많이 만들게 했고,
돈의 여유가 생기면 소달구지를 확보하고 전쟁을 위해 사육하는 말
대신 소를 정성껏 길러 가세를 키우게 했다.
건강한 신체에 부지런하여 상업에 뜻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돈을 빌어주어 장인들의 수공예품과 그림들을 사 모으게 했다.
이를 실천하여 각자 이문이 생기면 우선 자신들이 살던 초가집을
허물고 물건과 객이 드나들기 쉽게 미닫이문으로 개조한
장방형의 목조건물이 마주보며 일자로 원하는 물품을
편하게 찾도록 즐비하게 이어지는 거리를 만들었다.
선전<일광단, 월광단, 호사스런 비단>, 저포전, 미전, 잡곡전,
좌반전<짱아찌>, 연초전, 생선전, 유기전, 의전, 경염전<구운소금>,
상전<꿀 찌꺼기 가죽말총> 철물전, 과전, 채소전, 분전, 면포전, 지전,
승혜전<짚신, 삼은미투리>, 현방<고기>,
화피전<중국 과실, 벚나무 껍질>
시저전, 등의 상단을 거느리고 책쾌, 서쾌을 취급하는 거간꾼이 있는
거대한 경제도시로 강경을 꾸몄다.
그토록 많은 상인이 한 순간에 사라졌는데도
특별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작가 한명이 태어난 시골 마을도 치장하여
유명관광지로 만드는 외국에 비해
수백 년의 역사가 숨 쉬는 청정고도의 근대도시 강경을
방치한 시 당국행정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달수는 마지막 대행수의 글을 보자
흘러간 역사에 대해 너무 관심 없이 살고 있다는 것에
후손으로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시던 술잔을 물리고 소리 내어 대행수의 글을 읽었다.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한참을 감았던 눈을 뜨고
대행수가 옥녀봉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은
조부의 조부가 들려주었다던
황룡이 용트림하며 힘겹게 강경을 감싸 안는 모습
애타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송악에 사셨던 4대 조부가
이주를 결심하고 김삿갓을 만났을 때,
평양은 행주형이라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 바닥에 구멍을 내 침몰시키는 형이니,
평양 사람들은 대동강 물을 퍼서 생활에 사용하여야
기가 쇠하지 않는 지형으로 평양 사람의 행실이 문제이고...
강경은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이
마치 입에 물었던 여의주를 잃은 황룡이
급히 강경을 다듬어 여의주를 대신하여 승천하고자
몸부림치는 지형으로
시절과 하늘의 감복이 따라야
마을이 쇠하지 않는 다는 말을 듣고
조부의 조부는 사람의 행실을 믿을 수 없다며
시절을 따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송악에서 평양 대신 강경을 택해 이주했다 했네.
이제, 그대들은 가라, 가거라...
만주 던, 북간도던, 상해나, 법국이나, 아라사로 가라.
우리의 고려도 갔고, 너와 나의 조선도 저물어가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나라를 다시 세워야하니...
강경을 떠나...
그대들의 경륜과
그대들의 재물을 옳게 써야 하느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먼 훗날 조선 역사에 경제도시 강경이 있었다는 것/
잊지 말고...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달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 일찍 세종시를 지나
논산 초입에 들어서면서 수 십 번 읽은 대행수의
글을 되짚어 보았다.
일본에게 군사적 힘에 이어 경제적인 수단마저
빼앗길 수 없다며 상인들을 회유해 강경을 떠나게 한
대행수의 결단을 알 것 같았다.
황금 들판을 이룬 벼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화려하고 자랑스러웠던 강경의 슬픈 역사를 진정 아느냐고
물어 보는 것 같다.
왕복 2차선으로 접어들면서 강경경찰서를 지나 역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법원 앞에 도착했다.
청주에서는 대로변 교차로는 물론 골목 4거리에서도 흔히
보던 부동산 이라는 간판을 찾아 볼 수 가 없다.
차를 인도에 바짝 붙이고 2층 법무사 사무실에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채산리 산 10-1을 물었다.
나이 많은 분이 상세히 알려 주면서
이곳은 부동산 사무실이 없으니 주민들에게
용암사를 물어 보면 쉽게 알려 준다는 말을 덧붙였다.
조선 최초의 은행, 조선 최초의 법원과 경찰서를 뒤로 하고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이 도라고 말씀하신,
고운 최치원 선생의 말씀을 상기하며 마을 골목길로 들어섰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조금 걷자
올려보니 백운이요 건너보니 청산이라.
찌든 도시를 떠나 이곳에 오니 시조가 절로 읊어졌다.
대웅전의 동쪽에는 민간신앙인 7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 산사자락의 분홍빛 진달래가
말을 거는 듯, 산들바람에 좌우로 흔들린다.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따라
푸른 솔잎의 거목이 울창하고,
높새바람 부는 창공에 구름은 간곳없다.
푸른 하늘이 맑은 물처럼 천지를 감싸 안은 채,
지저귀는 산새 소리는,
세상 근심 다 떠나보내고 ,
달수를 즐겁게 따라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