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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강경

文奉志洪 0 119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한
뭉크미술 원장님이 보내주신 작품입니다.

연재소설 :  아서라.
지은이 : 문봉지홍

제 24 화 ; 아, 강경

달수는 800평이 넘는 집을 소유한 철중이 자신 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안쓰러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주를 마시면서 이영주의 주소지를 중심으로 지도를 살펴보다가
조선시대 3대 시장인 강경을 처음 가 본다는 것에 마음이 끌려
강경에 대한 문헌을 검색해 보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역사적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에
놀라워하면서 살피던 중에 경제도시 강경이라는 글을
논산 홈페이지 장터마당에서 발췌해 읽었다.

강경은 쇠퇴한 고을이 아니라,
좁은 면적에 비해 문화유적지가 가장 많고,
근대적 건물이 수세기 동안 그대로 연계 유지된 채로 개발이
가장 안 된 고도의 청정 고을입니다.
근대건물이 살아있는 교육도시라는 것을
고조시키면서 향토 젓갈 축제와 접목시켜야 된다고 하며 시작된다.

강경 보다 30배나 인구가 많았던 대구와 평양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고을이 대구를 넘어 평양에 버금가는 명성을 누렸던
그 수수께끼 같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
강경이 경제도시로 탄생된 과정을 가상으로 되짚어 보고자 쓴 글이다.

강경은 누구나 쉽게 찾아왔다가 쉽게 떠나는 고을이었지만,
강경을 찾았던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말하기를 강경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꼭 찾아보고 싶은 고을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강경은 지식과 충절의 고향이라 배고픔과 절망으로
갈 곳 없어 찾아왔다가도 많은 재물을 모으고 뜻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해서는 자신이 떠나왔던 삶의 터전인 고향으로 빠르게
되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었다.

강경은 면적이 좁은 관계로 집주위에 두른 담장은 모두 없애고,
이층 누각의 기둥은 배어버리고 호화롭게 채색한 단청도 벗겨버리고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려고 짓는 대저택을 용납하지 않았다.

강경은 육지가 풍년 일 때 곡물을 사서 저장할 수 있는
통풍이 수려한 곡간을 많이 지어야 한다고 미래를 설계했다.

1876년 개항이 되어 수입품이
들어올 때 여송연 1갑은 소 한 마리 값이고 황소는 40원이고
무명 1필이 12냥, 비단 1필이 쌀 35가마,
양초 4통이 쌀 1가마, 쌀 1가마는 12원 정도였다.

양반이라면 누구나 코에 걸쳤던 수입안경은 15원에 매매 되었고,
무엇보다 한심했던 것은 일본이 러일전쟁 때 진해 땅을 군항으로
쓰려고 흥정을 할 때 정부는 일본 외무성에 땅 한 평을 5전에
흥정을 했고, 주민은 9전을 요구했다.

나라 곳곳에서 흥청망청 자신의 이속만 챙기면서 나라의 흥망에는
관심이 없던 암울하기만 하던 시절에도 강경 상인들은
이익을 앞세운 매점매석과 같은 폭리에 현혹되지 않는 단합으로
상인 모두는 일본 수입품을 취급하지 않았고,
왜인들에게는 쌀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금 본위제를 쓰는 일본 돈이 들어와 일본지전을 은행에 가져가면
금으로 바꾸어 준다하는 소문이 각처에 떠돌자
조선 돈을 가지려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강경 상인들은 굴하지 않고 조선 돈을 고집했다.

발췌한 글을 읽을수록 나라를 사랑하는 상인들의
결속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서민들에게 시간이 나는 데로 작은 수레를 많이 만들게 했고,
돈의 여유가 생기면 소달구지를 확보하고 전쟁을 위해 사육하는 말
대신 소를 정성껏 길러 가세를 키우게 했다.

건강한 신체에 부지런하여 상업에 뜻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돈을 빌어주어 장인들의 수공예품과 그림들을 사 모으게 했다.
이를 실천하여 각자 이문이 생기면 우선 자신들이 살던 초가집을
허물고 물건과 객이 드나들기 쉽게 미닫이문으로 개조한
장방형의 목조건물이 마주보며 일자로 원하는 물품을
편하게 찾도록 즐비하게 이어지는 거리를 만들었다.

선전<일광단, 월광단, 호사스런 비단>, 저포전, 미전, 잡곡전,
좌반전<짱아찌>, 연초전, 생선전, 유기전, 의전, 경염전<구운소금>,
상전<꿀 찌꺼기 가죽말총> 철물전, 과전, 채소전, 분전, 면포전, 지전,
승혜전<짚신, 삼은미투리>, 현방<고기>,
화피전<중국 과실, 벚나무 껍질>
시저전, 등의 상단을 거느리고 책쾌, 서쾌을 취급하는 거간꾼이 있는
거대한 경제도시로 강경을 꾸몄다.

그토록 많은 상인이 한 순간에 사라졌는데도
특별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작가 한명이 태어난 시골 마을도 치장하여
유명관광지로 만드는 외국에 비해
수백 년의 역사가 숨 쉬는 청정고도의 근대도시 강경을
방치한 시 당국행정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달수는 마지막 대행수의 글을 보자
흘러간 역사에 대해 너무 관심 없이 살고 있다는 것에
후손으로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시던 술잔을 물리고 소리 내어 대행수의 글을 읽었다.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한참을 감았던 눈을 뜨고
대행수가 옥녀봉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은
조부의 조부가 들려주었다던
황룡이 용트림하며 힘겹게 강경을 감싸 안는 모습
애타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송악에 사셨던 4대 조부가
이주를 결심하고 김삿갓을 만났을 때,
평양은 행주형이라 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 바닥에 구멍을 내 침몰시키는 형이니,

평양 사람들은 대동강 물을 퍼서 생활에 사용하여야
기가 쇠하지 않는 지형으로 평양 사람의 행실이 문제이고...
강경은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이
마치 입에 물었던 여의주를 잃은 황룡이
급히 강경을 다듬어 여의주를 대신하여 승천하고자
몸부림치는 지형으로
시절과 하늘의 감복이 따라야
마을이 쇠하지 않는 다는 말을 듣고

조부의 조부는 사람의 행실을 믿을 수 없다며
시절을 따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송악에서 평양 대신 강경을 택해 이주했다 했네.

이제, 그대들은 가라, 가거라...

만주 던, 북간도던, 상해나, 법국이나, 아라사로 가라.

우리의 고려도 갔고, 너와 나의 조선도 저물어가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나라를 다시 세워야하니...

강경을 떠나...

그대들의 경륜과
그대들의 재물을 옳게 써야 하느니,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야만 하느니...

먼 훗날 조선 역사에 경제도시 강경이 있었다는 것/
잊지 말고...

가라, 가거라. 그대들은 가라.

달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 일찍 세종시를 지나
논산 초입에 들어서면서 수 십 번 읽은 대행수의
글을 되짚어 보았다.
일본에게 군사적 힘에 이어 경제적인 수단마저
빼앗길 수 없다며 상인들을 회유해 강경을 떠나게 한
대행수의 결단을 알 것 같았다.

황금 들판을 이룬 벼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화려하고 자랑스러웠던 강경의 슬픈 역사를 진정 아느냐고
물어 보는 것 같다.

왕복 2차선으로 접어들면서 강경경찰서를 지나 역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법원 앞에 도착했다.
청주에서는 대로변 교차로는 물론 골목 4거리에서도 흔히
보던 부동산 이라는 간판을 찾아 볼 수 가 없다.

차를 인도에 바짝 붙이고 2층 법무사 사무실에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채산리 산 10-1을 물었다.

나이 많은 분이 상세히 알려 주면서
이곳은 부동산 사무실이 없으니 주민들에게
용암사를 물어 보면 쉽게 알려 준다는 말을 덧붙였다.

조선 최초의 은행, 조선 최초의 법원과 경찰서를 뒤로 하고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이 도라고 말씀하신,
고운 최치원 선생의 말씀을 상기하며 마을 골목길로 들어섰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조금 걷자
올려보니 백운이요 건너보니 청산이라.
찌든 도시를 떠나 이곳에 오니 시조가 절로 읊어졌다.

대웅전의 동쪽에는 민간신앙인 7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 산사자락의 분홍빛 진달래가
말을 거는 듯, 산들바람에 좌우로 흔들린다.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따라
푸른 솔잎의 거목이 울창하고,
높새바람 부는 창공에 구름은 간곳없다.

푸른 하늘이 맑은 물처럼 천지를 감싸 안은 채,
지저귀는 산새 소리는,
세상 근심 다 떠나보내고 ,
달수를 즐겁게 따라붙는다.

용암사는 감로수가 일품이라 했다.

방황하는 자아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이르는
과정을 소 길들이는 10단계의 그림으로 그린
십우도를 보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노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이라는 문구가 생각나자
달수는 갈증을 느낀다.

대웅전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다.

스님을 찾아 별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사채에 겨우내 처마에 매달아 놓은 시래기와 말린 호박이
작은 바람에 흔들리며 정겹게 맞아 주는 곳으로 향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나오는 주지 스님을 만난 달수는
스님을 따라 합장 인사를 나누고 나서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말을 하고는 주지스님 방으로 가 곡차를 놓고 마주 앉았다.

이영주라는 분을 찾는다고 하면서 가져간 등본을 보여주었다.

스님은 자신이 부임하기 전 일이라 잘 기억을 못 한다면서
마을 초입에서 슈퍼를 운영 하시는 분이 용암사 법우로
50년 넘게 공양을 하시니 내려가는 길에 들려 보라고 했다.

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기와집 밑으로 미닫이문
유리에 슈퍼와 담배라고 써진 문구를 보고 차를 멈췄다.

달수는 한산도 담배 한 갑과 오렌지 주스 값을 계산하고
나이 많은 여자 분에게 말을 걸었다.

“용암사 주지 스님을 뵙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법우님께 궁금한 것이 있어 묻고 싶습니다.”

오가는 사람이 적어서 말 상대가 없던 차에 반갑다는
표정으로 칠순을 넘은 여인은 말을 살갑게 받았다.

“무엇이던 물어 보소, 내가 용암사에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몸담고 있응게.“

“예, 제가 사람을 찾는데 이영주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여인은 달수를 찬찬히 살폈다.

“암, 알지 헌데 댁은 뉘시오?”
달수는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제가 가족의 부탁으로 이영주라는 사람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영주 가족은 내가 다 아는데 누구 부탁이요?”

“그게 , 좀...”

“나도 그럼 말 못하지.”

달수는 여인이 이영주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 이영주님의 아들 부탁입니다.”

“ㅎㅎㅎ“
“호호 하하하”
여인은 호탕하게 웃고 나서 말했다.

“경찰도 별거 아니구만, 뻥을 치게
영주 이모는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네.”

여인은 계속 웃으면서 자신이 이영주의 조카라고 했다.
자신의 엄마가 이영주의 언니라면서 지난 이야기를 했다.

너무나 가난했던 할아버지는 이모를 용암사에 보내
허드레 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으라고 했다.

심성이 착하고 부지런한 이모는 참모 일을 하면서 절 음식에
두각을 나타내 공주 익산 청주까지 소문이 났다.

어느 날 청주 갑부가 할아버지에게 많은 돈을 주고 이모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집 안 일을 시키겠다고 했다.

청주로 간 후에 40년 동안 한 번도 강경에 나타나지 않았던 이모가
용암사에 오신 지 6개월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신고를 하려고 보니 주소지에 자식 같은 나이의 남편이 있었다.
남편(세종)이라는 분을 만나 보니 이모(영주)와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서류상 부부로 되어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청주 갑부 차태식이 돈으로 강세종 이라는 사람과
이모를 법적으로 엮어 놓았는데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남편이라는 사람과 조카인 자신도 아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사망신고를 마치고
만날 이유가 없어 지금까지 연락 안 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

청주로 차를 몰면서 용암사 벽화에 그려진 십우도를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마라
미워하는 사람을 갖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 날 까 두렵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종교가 없는 자신이 세상 만물의 조화를 깨우치지는 못했어도
철중 선배를 생각 할수록 형제도 없고 친척도 없고
더구나 엄마를 본적도 없이 기구한 운명을 사는 것이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에 혀를 찼다.

달수는 경찰서로 돌아와 호적에 있는 시중, 주성, 소영과
주민등록에 기재 된 차영란의 이름을 차례로 검색했다.

시중은 대전에서 정신과 의사로 명성이 자자했고,
주성은 조치원에서 내과 의사로 자리를 잡았다.
차영란 이라는 이름은 8명이 나왔다.
그중 3명은 40대 미만이라 제외했다. 4명에게 전화를 하고
대화를 한 결과 철중 선배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연거푸 전화를 해도 한 명은 끝내 받지를 않았다.

시중과 주성은 진료하느라 전화 통화가 쉽지 않아
현역 국회의원 강소영 이라는 분에게 전화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자 허락을 했다.

대전 유천동 작은 단독 집 초인종을 눌렀다.
주름이 많은 얼굴이지만 곱고 세련된 여자 분이
흰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오라면서 옆으로 비켜주었다.

나무를 잘라 썩지 말라고 불로 나무껍질을 태워 잔디 사이에
묻어 발 디딤돌로 사용하게 한 징검다리 식 나무 판을 밟고 걸었다.
열린 현관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소박한 갈색 소파가 보였다.
여인은 앉으라고 하면서 찻잔에 시원한 오미자차를 받쳐왔다.

흰색의 정갈한 거실 한쪽 벽은 서재를 연상케 하는 책장에
법률 서적이 가득했다.

책장 정 가운데는 책 대신 작은 액자에 남자 셋과
여인 둘이 다정히 웃으며 찍은 사진이 있다.

그중 한명이 자신이 오늘 만나는 소영을 닮았다.

달수가 사진을 유심히 보고 있자,
“여자 둘 중에 한명이
저랍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습니까?“

달수는 호적등본을 여인에게 보여주었다.
여인은 숙달된 동작으로 등본을 보더니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과 세종이는 강용필 원장이 입양했다고 했다.

당시 강원장의 고아원은 양 부모가 사고로 사망하거나
이혼 등으로 호적이 확실한 아이들을 정부의 후원으로 보호 하다가
19세가 되면 독립을 시키는 기관 이었다.

고아원과 다르게 출생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입양기관도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보도되었다.
우리나라가 아이를 외국에
입양시키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시민권을 받지 못해
성인이 되어 강제추방 된다는 것이 알려져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강원장은 친구가 운영하는 입양기관의 부탁으로 외국으로 입양을
보내지 못하는 3명의 남자와 여자 1명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입양사건으로 냉랭해진 분위기는 전국 고아원 후원자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해 생활이 어려워졌다.
아이들이 성장해 대학에 진학하자 등록금으로 어려움을 겪던 원장님은
고아원 부지를 담보로 빚을 지게 되었다.
4년이 되기도 전에 고아원 부지를 경매로 넘겨야했다.

4명의 아이들을 위해 공사장도 다니고,
청주 갑부의 논과 밭을 가꾸면서 선자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양아버지는 내색 하지 않고 두 명은 의사 한 명은 체육인
자신은 판사로 만들었다고 했다.

판사였다는 말을 들은 달수는 수사 중인 사건이라 자세히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세종이라는 분과 연관 되어진 사건 같아 찾아
뵈었다고 하면서 단서가 호적등본과 차영란 이라면서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도움을 바란다고 했다.

적은 수사비용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경찰들의 고충을 아는 전직 판사는
지그시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사랑 받지 못한 사람들 이었을 겁니다.”
“고아인 우리나, 부모가 있어 부족함 없는 영란이나 ”

영란 이라는 이름에
달수는 정신이 바짝 들어 전직 판사의 말을 잘랐다.

“영란이라구 말씀 하셨나요?”
“혹시 제가 찾으려 하는 차영란을 말하시는 건지요 .”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 사진에 있는 내 옆의 여자가
차영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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